첨단바이오가 그리는 미래
첨단 바이오가 그리는 미래
기고 | 정해영 센터장(KOBIC 국가생명연구자원정보센터)
위기의 시대, 바이오가 제시하는 새로운 돌파구
21세기 인류는 저성장, 팬데믹, 기후변동 등의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기존 산업 체계로는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성장 동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 희망은 바로 ‘바이오경제(Bioeconomy)’다.
OECD의 정의에 의하면 바이오경제는 생물자원의 생산과 이를 제품(식품, 재료, 의약품, 에너지 등)으로 전환하는 과정 전체를 혁신적 기술을 통해 실현하는 경제를 말한다. 이 시스템은 지속 가능성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화석 기반 산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2025년 글로벌 바이오 시장 규모는 이미 반도체 산업의 세 배 이상으로 성장하여 2조 4천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각국은 바이오경제 시대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국가 경제, 사회, 안보의 패러다임 전환에 직결되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바이오를 둘러싼 글로벌 시장은 과학기술 패권을 둘러싼 전면전의 새로운 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와 디지털 전환의 중심에 선 바이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전환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물결 속에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사물인터넷, 로봇 기술, 생성형 인공지능(AI) 등이 모든 산업과 일상에 침투하면서 산업구조 자체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바이오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전환의 혜택을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체감하고 있는 영역 중 하나가 바로 생명공학이며, 이는 바이오경제를 끌고 나가는 핵심 엔진의 역할을 한다.
유전체 분석, 단백질 구조 예측, 신약 설계, 디지털 치료기기, 생체 데이터 기반 개인 맞춤의료 등은 모두 인공지능 기술과 결합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생물학은 데이터의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변동성이 높기 때문에 AI의 적용에 매우 적합하다. 3차원 구조 기반 약물 타깃 예측, 단백질-리간드 상호작용 분석, 유전자 편집 정확도 향상 등 AI가 도입될 수 있는 영역은 사실상 무한하다. 이미 2024년도 노벨상 수상 사례를 통해 우리 모두는 AI가 생명공학 분야의 발전에 얼마나 크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목격하지 않았는가.
바이오 데이터의 폭발적인 증가는 다시 AI의 기술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전 세계 병원과 연구소, 유전체 분석 기관, 웨어러블 디바이스,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등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는 매년 수십억 건에 달하며, 이는 전통적인 분석 방법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규모다. AI는 바로 이 ‘초과 데이터 시대’를 해석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지배하는 통찰력으로 바꾸어 나가는 핵심 도구가 되었다.
반도체 황제라고도 불리는 엔비디아(NVIDIA)의 최고경영자 젠슨 황은 “인공지능에 의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중략)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생명공학을 공부하겠다”고 밝히며, AI 시대 이후의 핵심 산업으로 생명공학을 지목했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생명과학에 특화된 생성형 AI 플랫폼인 BioNeMo를 통해 신약 후보물질의 구조 예측, 단백질 상호작용 시뮬레이션, 유전체 기반 치료제 설계 등에서 획기적인 결과를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Evo2’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완전 개방형 유전체 파운데이션 모델이 BioNeMo에 탑재되어, 병원성 돌연변이 예측, 유전자 필수성 분석 등에서 기존 모델을 능가하는 성능을 입증했다. 이는 AI가 생물학적 서열의 기능과 특성을 해석하고 예측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설계의 범주까지 넘보게 만든 혁신인 만큼 그 결과의 안전한 활용에 대한 윤리적 논의도 필요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첨단바이오 국가 전략의 진화
우리 정부 역시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2023년 6월 정부는 ‘디지털 바이오 혁신전략’ 에서 AI 기반 신약개발, 디지털 치료기기, 합성생물학, 휴먼 디지털트윈, 오가노이드 등 첨단기술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계획은 2030년까지 바이오산업을 100조 원 규모로 성장시키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담고 있으며, 데이터 기반 R&D, 바이오파운드리 구축, 글로벌 진출 지원까지 포괄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바이오 경제 2.0 추진 방향’에서는 ‘바이오 경제 얼라이언스’ 출범과 함께 바이오 산업을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하기 위한 정책 프레임이 제시됐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정밀한 정책 실행 로드맵과 제도 기반 마련, 민관 협업 모델 설계 등을 포함하는 종합전략이었다.
2024년 4월에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통해 수립된 ‘첨단바이오 이니셔티브’가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정의한 첨단바이오란 AI·나노·로봇 등 융합을 통해 기존 바이오의 한계를 극복하는 신기술·신산업으로, 디지털-바이오의 융합 및 제조 혁신을 통해 2035년 글로벌 바이오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비전을 제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첨단바이오가 AI와 함께 기술주권 확보에 필수적인 12대 국가전략기술로 지정되어 미래혁신 기술의 양대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첨단바이오는 데이터 기반 R&D 전환, 합성생물학, 바이오안보 등 여러 분야에서 파괴적 혁신을 이끌 기술로 평가되었으며, 공공 바이오파운드리 구축, 데이터 기반 인프라 확대, 인재 양성 등이 핵심 정책으로 제시되었다. 특히 이 두 가지 기술은 강대국 중심의 블록화가 뚜렷하고 이중 용도 활용 가능성도 높아서 안보적 관점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된다.
2025년 1월에는 세계 바이오 5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정책적 구심점 역할을 할 대통령 직속 국가바이오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 위원회는 범부처 민관협력 체계로서 바이오 대전환을 위한 기반(Infrastructure), 연구개발 혁신(Innovation), 및 산업(Industry) 측면의 핵심 과제를 도출했다. 구체적으로는 신약 개발 기간과 비용을 절반으로 단축하고, 데이터 1천만 건 확보, 생명과학 인재 11만 명 양성, 1조 원 규모의 민관 기금 조성 등 구체적인 성과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특히 산학연병 협력형 클러스터 구축, 규제 혁신, 글로벌 임상 연계 전략 등이 기존 정책보다 훨씬 정교하게 짜여 있으며 강력한 실천을 강조했다.
AI 실력 발휘를 위한 데이터 생태계 조성이 시급
AI는 첨단바이오의 핵심 분야 중 하나인 신약 개발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유의해야 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2월 Nature는 신약 개발에서 AI가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네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데이터의 질과 표준화 부족이다. 서로 다른 실험 환경과 기술, 명명법 차이 등으로 인해 AI가 ‘배치 효과(batch effect)’를 잘못된 생물학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부정적 결과의 미공개 문제다. 대부분의 논문과 특허는 성공 사례만 공유되며, AI는 실패 데이터를 학습하지 못해 현실 왜곡이 발생한다. 셋째는 기업 간 데이터 공유의 한계다. 제약사와 연구기관은 보유한 대규모 데이터를 좀처럼 외부에 공유하지 않으며, 이는 AI 모델 성능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 된다. 마지막으로, 고품질 데이터셋의 부족이다. 데이터의 양이 많아도 품질이 낮으면 AI의 판단력은 오히려 퇴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디지털화·AI에 기반한 첨단바이오의 발전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와 ‘문화’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AI 알고리즘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재료가 되는 데이터의 품질과 개방성이 부족하다면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가입한 건강보험과 전자의무기록(EMR), 공공병원의 유전체 정보 등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의 ‘대국’으로 인식되지만 정작 산업계에서 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생태계가 미흡한데다가 법·제도적 뒷받침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KOBIC과 KISTI의 역할 기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바이오 대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데이터의 수집 및 제공(공급 측면)과 이를 다룰 수 있는 전산 인프라(활용 측면) 마련이 필요하다. 이미 국가생명연구자원정보센터(KOBIC)와 KISTI 국가슈퍼컴퓨팅본부 디지털바이오컴퓨팅연구단은 국가바이오데이터스테이션과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을 통해서 대량의 바이오 정보 생산·수집·공유 및 활용 기반 조성에 이르는 국가적 사업의 협력을 진행해 오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첨단바이오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 KOBIC은 AI 학습에 적합한 고품질 바이오 데이터를 구축하고, 메타데이터 표준화, 데이터 정제, 개방형 데이터 생태계 조성을 책임져야 한다.
올해 창립 24주년(통산 63주년)을 맞는 KISTI는 과학기술 및 산업정보 서비스를 시작으로 현재는 디지털 전환 시대를 맞아 국가과학기술 데이터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KISTI는 슈퍼컴퓨팅 인프라, AI 알고리즘 검증 플랫폼, 공공 AI API 서비스 등을 통해 바이오와 데이터를 잇는 다리 역할을 맡아야 한다. 특히, 중소 바이오기업과 연구기관이 고가의 AI 기술과 컴퓨팅 자원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지원자 역할을 함으로써 분산된 데이터의 활용 역량을 강화하여 우리나라의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2025년 3월 열린 매일경제 비전코리아 국민보고대회에서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로 성장해 온 대한민국이 저성장의 늪에서 탈출하여 재도약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3년에 불과하며, 세계는 이미 바이오 패권을 위한 무한 경쟁 시대로 돌입했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미 바이오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이 거대한 기회를 실현하는 데에는 세밀하게 짜인 국가 전략의 강력한 추진, 이를 뒷받침할 법과 제도의 정비, 그리고 각 실행자들의 유기적 협업이 필요하다. 첨단바이오가 그리는 미래는 단순한 산업의 변화를 넘어, 인류의 생존, 건강, 번영의 방식 자체를 다시 그리는 청사진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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